사랑니 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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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27회 작성일 21-08-1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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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는 환자에게나 치과의사에게나 애물단지 취급을 받기가 일쑤다.

사랑니도 앞의 어금니가 상해서 빼야할 경우에 브리지를 걸어서 쓰기위해 귀한 취급을 받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임플란트로 인해 찬밥 신세가 되어버렸다.


환자의 입장에서 사랑니를 뺀다는 것은 무섭고 많이 아플 것 같은 공포의 대상이다. 

그렇다고 놔두자니 치아 주변의 잇몸이 자주 말썽을 부리고 음식물이 끼어 충치가 쉽게 생기기도 하며, 

심지어는 기울어진 사랑니 때문에 그 앞의 어금니 뿌리가 상하기도 한다.

 

치과의사의 입장에서는 빼주자니 너무나 어려운 케이스가 많고, 

사랑니 주변을 지나가는 신경과 혈관에 손상을 줄 수 있는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 

마음은 빼주고 싶지만 기술과 경험 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큰 병원으로 의뢰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랑니를 수술하는 데에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과 위험부담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크지 않다는 것 역시 

사랑니 발치를 기피하게 되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파노라마를 찍어 판독을 할 때 사랑니의 치근이 하치조신경관(아래턱 속에 있는 굵은 신경관으로,

신경과 혈관이 이 안으로 지나가며 이 신경은 아래 치아와 아래턱뼈에 분포한다)과 겹쳐있는 상태가 보일 때부터 

치과의사의 고민은 시작된다. 

내가 이것을 뺄 수 있을까, 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신경 손상의 위험부담을 안고 수술을 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병원으로 의뢰를 할 것인가.


인턴으로 구강외과를 돌던 때 매복된 사랑니를 빼기 위한 첫 수술을 했었다. 

치아가 완전히 누워있었고 뼈가 많이 덮여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경험 부족이었던 탓인지 

두 시간에 걸쳐 끙끙거리며 겨우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다음 날 내원한 환자는 사랑니를 뺀 쪽의 입술이 부르텄고, 

마치 사탕을 한 알 물고 있는 것처럼 사랑니 뺀 곳이 퉁퉁 부어있었다.

‘힘들게 사랑니 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라는 환자의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후 군의관 시절을 거쳐 개원을 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랑니를 뺐고, 

여의도에서 개원하던 시절에는 쌍둥이빌딩이라 불리던 LG 빌딩의 수많은 직원들을 치료하고 사랑니를 빼주었는데, 

사원들 간에는 내게 “신의 손”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는 낯간지러운 이야기도 들었다. 

아프지 않게 빨리 빼기도 하고 뺀 후에도 별 탈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니 발치를 계속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 사건이 생겼다.

 

사랑니를 빼기 위해 나를 찾아온 환자가 있었다. 

검진 후 파노라마를 찍었는데, 뿌리의 만곡이 너무 심하고 신경관과 완전히 겹쳐있어서 발치가 어려운 것은 물론 

신경의 손상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너무나도 크다고 판단이 되었기에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기를 강력히 권했었다.

하지만 이 젊은 여성은 막무가내였다. 

사랑니는 꼭 원장님께 빼야 한다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 추천을 받고 왔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나에게서 빼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나는 발생 가능한 합병증을 자세히 설명하고 다짐을 받은 후에 수술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수술은 다행히 길지 않은 시간에 끝났고 뿌리도 끝까지 잘 나오고 수술 하는 동안도 별 다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소독을 하기 위해 내원한 환자는 볼과 잇몸의 감각 이상을 호소했다. 

약을 복용하고 치료를 받으면 회복되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정상적으로 돌아온다는 설명을 

수술하기 전부터 충분히 설명을 했던 터라 다시금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소독을 하고 돌려보냈다.

 

그날 이후 내원도 안하고 전화 연결도 되지 않던 환자는 약 두 달 정도가 지난 후에 다시 왔다.

지난 두 달 동안 대학병원에서 감각 이상에 대한 치료를 받았다며, 그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지불한 치료비와 약값, 

병원을 다니기 위해 지불한 택시요금 등을 정리한 청구서를 내밀며 내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환자의 기가 막힌 태도와 요구에 대해 내 마음은 매우 복잡했고,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렇게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당혹스러움으로 인해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환멸감까지 느껴지는 슬럼프에 빠졌었다. 

그 사건 이후로 한참 동안은 사랑니를 발치하기 위해 환자가 내원하면, 파노라마를 찍어보고 

조금이라도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랑니는 더 이상 발치하지 않고 대학병원으로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도 여전히 매복되어 있는 사랑니를 수술한다. 

파노라마를 찍어 신경관과 겹친 상이 관찰되면 바로 CT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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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의 위치와 신경관과의 근접성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고 또 분석하여 

가능한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치아를 잘라내고 힘주는 방향을 조절하면서 수술을 진행한다

.

오래 걸리고 아프고 고생할 각오를 하고 온 환자는 

걱정에 비해 의외로 아프지도 않게 빨리 빼낸 사랑니를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나는 케이스의 난이도에 관계없이 수술을 하고나면, 

환자가 다음 날 소독을 하기위해 내원해서 아무 탈 없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안심을 하게 된다.

 

아마도 오래 전 그 환자로 인해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아직도 진하게 가슴속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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